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르샤바 봉기 (문단 편집) === 9월의 상황 === 9월 10일에 이르면 봉기는 암울한 운명에 빠져들게 된다. 폴란드 봉기군은 봉기 내내 보급품과 무기가 부족했는데, 무기 상황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심히 암울했다. 많은 역사가들이 봉기 실패 이유로 가장 큰 것을 '보급품 부족'과 '무기 고갈'로 꼽는다. 만일 폴란드 봉기군이 좀 더 시간을 기다려서, 좀 더 많은 무기와 대공화기를 손에 쥐고 있었다면, 폴란드 봉기군이 그렇게까지 심하게 두들겨 맞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봉기를 연기했다면 소련군한테 바르샤바가 함락될 때까지 봉기군은 제대로 된 전투 한 번 못 하고 끝났을 가능성도 있다.] 밀려오는 독일군을 피하기 위해 봉기군은 [[미로]]처럼 얽힌 바르샤바의 하수도로 숨어 들어가 저항을 계속했다. 그러나 독일군이 계속 밀려들어왔고, 이제는 하수도 안에서도 수류탄이 터지고 독일군의 화염방사기로 인해서 사상자가 속출했다. 9월 말이 되자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다. 시민들은 너무도 굶주렸고 잡아먹을만한 쥐조차 남지 않았으며, 봉기군의 무기와 탄약도 거의 떨어졌다. 9-10일 바흐첼레프스키는 바르샤바 시민들에게 도시를 떠나라는 권유문을 살포하였고, 폴란드 [[적십자]]가 독일군과 협상을 하여 2시간 동안 포격을 중단하기로 합의했다. 이후 독일군은 도시 북부에 대한 공세를 개시했다. 시민들은 도시 남쪽으로 도망쳤다. 11일에는 소련군이 다시 공세를 개시, 독일군을 비스와 강 서안으로 몰아붙였다. 당시 연합군 공군 소속으로 공수 지원에 참여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의 윌리엄 페얼리(William Fairly)는 1982년 바르샤바의 참상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바르샤바를 찾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100km 밖에서도 보일 정도였으니까. 불바다가 된 도시에서 타오르는 거대한 화염 때문에, 목표지역에 떨어뜨린 조명탄마저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https://en.wikipedia.org/wiki/Warsaw_Uprising#Airdrops|#]] 9월 중순, 소련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https://en.wikipedia.org/wiki/Polish_Armed_Forces_in_the_East|폴란드 인민군]]은 국내군과의 이념의 차이를 넘어선 동포애로 어떻게든 바르샤바와의 교통을 연결하기 위해 처절하게 싸웠지만, 이들의 포위망 돌파 공세조차 실패로 돌아가자 소련은 바르샤바를 포기하였다. 9월 14일에 [[https://en.wikipedia.org/wiki/Zygmunt_Berling|지그문트 베를린크]]가 지휘한 공산 폴란드군은 비스와 강 동안 지구를 점령하였고, 15일부터 17일까지 1,200여 공산 폴란드군이 체르니아쿠프(Czerniaków)와 포비실레(Powiśle) 등에 상륙, 투입되었지만 결국 패배, 23일까지 살아남은 병사들은 강을 도하하여 소련군 진영으로 도망쳐 들어왔다. [[영국]]과 [[미국]]도 더 이상 소련에게 압박을 넣지 못했다. 9월 18일에 미국이 대규모의 공수지원을 실시하였으나 봉기군 수중에 떨어진 보급품은 20%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독일이 죄다 먹어치워 버렸다. 봉기 기간 동안 영국과 미국은 총 합계 200회에 걸쳐 공수지원을 실시했다. 영국군은 이 공수 지원으로 34기의 항공기를 손실했다. 의외로 소련군도 바르샤바 공수보급에 참여했으며 보급이 진행되던 기간 동안 2000소티로 연합군 최대의 출격횟수를 올렸다. 허나 보급에 투입된 항공기가 무려 [[Po-2]] 였기 때문에, 아담한 화물 적재량은 둘째치고 낙하산 없이 투하한 물품들 대다수가 소련제였기 때문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더군다나 이후에는 봉기군에게 투항을 종용하는 삐라를 살포하는 천인공노할 짓거리를 저질렀다. 치열한 전투 끝에 폴란드군이 보유한 영역은 조금씩 줄어들어, 20일에 이르면 원래 8개로 나뉘어 있었던 폴란드군의 전투구역은 다시 3개로 개편되어야 했다. [[http://www.periskop.info/2007/05/%EB%B0%94%EB%A5%B4%EC%83%A4%EB%B0%94-%EB%B4%89%EA%B8%B0-%EC%86%8D%EC%9D%98-%EA%B0%80%EB%B2%BC%EC%9A%B4-%EC%9C%A0%EB%A8%B8/|노먼 데이비스(Norman Davies)의 『Rising '44』의 내용]]에 따르면 >'''1944년 9월 18일 미군의 공수 보급을 바라본 두 시선''' > >폴란드 국내군 사령관 부르코모로프스키의 회고: > >그 날은 날씨도 좋고 햇살 가득한 날이었다. 청명한 하늘. > >물론 바르샤바 주민들은 구원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미군 비행기들이 도시 상공 머리 위로 날아가는 예상치 못했던 모습은 형언하기 어려운 기쁨을 자아냈다. 폭격기들은 매우 높은 고도를 비행했고, 그들 뒤에는 하얀 반점들의 자국이 남았다. 낙하산들이었다. > >독일군은 대공포화를 날려 대었으나, 비행기에는 이르지 못했다. > >바르샤바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열정의 순간들을 헤쳐왔다. 병자와 부상자들을 제외한 모두가 지하실에서 뛰쳐나왔다. 은신처에서 나온 사람들이 거리와 뜰을 메웠다. 그들은 이게 폴란드 공수여단의 도착이라고 믿었다.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한 병사는 쌍안경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그는 고함쳤다: > >'이럴 수가, 독일군이 저들을 쏴대고 있어!' > >한 장교가 그를 진정시키며, 그들은 공수부대원이 아니라 무기와 보급품을 담은 컨테이너에 불과하다고 설명해줬다. > >'하지만 쌍안경으로 하늘에 흔들리고 있는 그들의 다리를 볼 수 있다니까요!' > >병사는 계속 주장했다. > >그래도 독일군들도 자기 부대들에게 비상을 거는 것을 보니 똑같이 판단 착오를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독일군 수송부대 병사 H. 슈트렉바르트의 일기: > >우리는 오늘 지휘소에서 대부분이 뉴스필름에서나 보아오던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13시 55분 경 미군과 영국군 비행기들이 약 1,000미터 상공에 처음 2~3대씩 짝지어 나타났다. 대략 50~60대는 되어 보였다(나는 54대까지 세다 포기했다). 거대한 새 무리가 날아오르듯 많은 수의 비행기가 있었다. 그러다 우리는 뭔가 비행기에서 떨어지는 것을 알아챘고, 그것들은 우리들 바로 상공에 있어 보였다. 낙하산이 펴진다! 경보가 내려지고 포화가 울려대었다. 몇몇은 사람과, 관절과, 손을 목격했다고 얘기했다. 그렇다면 서부에서처럼 여기도 마침내 공수부대가 투입되는 것인가? 여기에 그럴리는 없는데. 낙하산이 내려오면서 나는 까만색, 초록색, 노란색, 흰색 등 갖가지 색깔의 낙하산을 목격했다. 오, 저것들은 보급품 용기들이다![* 바로 그 폴란드 공수여단의 바르샤바 공수는 연합군 사령부에 의해 검토되고 있었으며 폴란드 공수부대원들의 간절한 숙원이기도 했다. 허나 폴란드 공수여단의 바르샤바 공수는 무산되었고, 바르샤바 대신 투입된 곳이 바로 [[마켓 가든 작전]]이었다. 폴란드 공수부대가 마켓 가든 작전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는 문서에 잘 기술되어 있다. 여담으로 폴란드 공수부대가 마켓 가든에 강하하던 바로 그 시각에 바르샤바에서는 공수 보급이 진행되고 있었으며, 바르샤바의 봉기군들과 독일군 모두 이를 폴란드 공수여단의 투입이라고 착각하는 비참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 >…다른 용기들 안에는 독일 탄약이 있었다. 오, 이렇게 예의바를 수가. 미군들은 우리가 황급히 서부에 버려두고 온 보급품들을 갖다주고 있었다. 그것도 비행기로 바르샤바에 있는 우리한테까지 배달해주다니![* 연합군이 독일제 탄약을 공수한 것을 이상하게 여길 필요는 없다. 당시 폴란드 국내군의 주요 무장은 독일군으로부터 노획한 독일제 화기였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선 당연히 독일제 탄약이 필요했다. 문제는, 국내군 점령지역이 매우 좁은 상태이다 보니 이 독일제 탄약이 대부분 독일군 측에게 넘어갔다는 것이다.] 사실상 당시 폴란드의 외적, 내적 상황으로는 이 봉기는 성공하지 못할 운명이였던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무려 2달에 걸쳐 우세한 독일군에 맞서 싸운 폴란드 봉기군과 시민들의 투지는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봉기군 작전처장이었던 레오폴트 오쿨리츠키(Leopold Okulicki) 대령의 경우는 총탄이 빗발치듯 쏟아지는 독일군 기관총 진지에 몸을 꼿꼿이 세우고 수류탄과 함께 돌진하는 등의 솔선수범을 보이기도 했다. 전후에 오쿨리츠키 대령은 소련에 의해 체포되어 살해당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